1,000불과 오토바이, 비닐하우스: 우리 가족의 이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의 이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크게 성공했다가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후, 열여덟 살이었던 아버지는 갑자기 네 식구의 가장이 되셨습니다. 공부할 나이에 동생들과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의 인생은 이후로도 계속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 저의 어린 시절은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의 기억
서울 외곽, 논과 밭 사이에 있던 작은 비닐하우스. 그곳이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시며 외쳤습니다. “애들 데리고 빨리 외할머니 집으로 가!”
철거반이 비닐하우스를 부수러 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들과 맞서 싸우고 계셨습니다. 유치원생이었던 저는 집이 무너질까 봐 떨면서 엄마 손을 잡고 도망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우리 가족의 유일한 이동 수단은 작은 오토바이 한 대였습니다. 아버지 앞에 제가 앉고, 뒤에는 누나와 엄마가 매달려서 네 식구가 오토바이 하나에 의지해 움직였죠. 지금 생각하면 위험했지만, 그 좁은 오토바이 위에서 우리는 참 끈끈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출국 한 달 전, 마지막 시련
파라과이에 먼저 간 이모의 권유로 이민을 결심한 후,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였습니다. 출국을 한 달 앞두고 우리 비닐하우스에 불이 났습니다.
준비했던 이민 짐은 물론, 어린 시절 사진들까지 대부분 타버렸습니다. 그 불은 제 기억의 절반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결국 1년을 더 버티다, 다음 해에 우리는 한국을 떠났습니다.
전 재산 1,000불을 들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우리 가족이 가진 전 재산은 딱 1,000불이었다고 합니다. 네 식구가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데 가진 돈이 고작 1,000불이라니…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LA를 거쳐 남미로 가는 길. 여덟 살이었던 저는 멀미로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살게 될까?’ 이런 생각도 없었고, 그냥 아무 생각 없었던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