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배우러 갔다가 과라니어부터 배워버린 8살 꼬마 이야기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만 마친 상태였고, “이민”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부모님 손에 이끌려 지구 반대편으로 오게 된 것이었죠.
처음 마주한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거리의 냄새도,
사람들의 피부색도,
들려오는 말소리도 전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첫 기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기다림.”
학기 중간에 입국하는 바람에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몇 달 동안 집에만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밖의 낯선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한인 없는 학교로 들어가다
드디어 새 학기가 시작됐고, 저와 누나는 현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교육 철학은 꽤 확고하셨습니다.
“아이들은 한인이 없는 곳에 던져놔야 언어를 빨리 배운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과감한 결정이었죠.
그렇게 저와 누나는 한인 학생이 3명 있던 현지인 학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누나와 저는 같은 학년, 같은 반.
매일 아침 교복을 입고 남매가 20~30분씩 걸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길은 어린 저희에게 거의 탐험 수준이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당연히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 했습니다.
친구들이 웃으면,
저를 보고 떠드는 것 같았고,
괜히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세상이 전부 적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 저는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같은 생존 본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면 일단 쫓아가서 싸우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싸움을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나라,
낯선 인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몸이 먼저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짠하면서도 웃긴 기억입니다. 국민학교 때 맞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ㅋㅋㅋ
부모님의 계획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스페인어를 빨리 배우길 바라셨지만, 정작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진짜 많이 쓰던 언어는 스페인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과라니어(Guarani).
파라과이 원주민 언어였습니다. 선생님들까지도 과라니로 학생들을 혼내시곤 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단어는 "빼끼리니"(조용히 해) 라는 말입니다. :)
파라과이는 남미에서도 특이하게 원주민 언어 사용 비율이 매우 높은 나라입니다.
특히 아이들끼리 놀 때는 과라니어를 훨씬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스패인어와 과라니를 섞어서 사용하다 보니, 초창기에는 뭐가 과라니고 뭐가 스패인어인지도 모르고 그냥 모두 흡수된 것 같아요 ㅋㅋㅋ
결국 저는 집에 와서 스페인어보다 과라니어를 먼저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꽤 충격적인 상황이었겠죠.
“아니, 스페인어 배우라고 보냈더니 원주민 말을 먼저 배우고 있네?”
결국 다음 학기가 되자 부모님은 저희를 한인 학생들이 어느 정도 있는 학교로 전학 보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의 “스페인어 몰입 교육 프로젝트”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셈입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적응한다
돌아보면 아이들의 적응력은 정말 무섭습니다.
처음에는 말 한마디 못 해서 싸우기 바빴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공부해서 외운 언어”
가 아니라,
“살아남으면서 몸으로 익힌 언어”
가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교과서 문법보다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배운 표현들이 진짜 제 언어가 되었던 것이죠.
아마 그 시절이 있었기에 저는 이후 스페인어를 훨씬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감사한 경험
솔직히 당시에는 힘들었습니다.
무섭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고,
왜 갑자기 이런 나라에 와야 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압니다.
그 경험 덕분에 저는 훨씬 강해졌다는 것을요.
만약 부모님이 처음부터 안전한 한인 환경 안에만 저희를 두셨다면, 저는 파라과이라는 나라의 진짜 모습과 남미 특유의 거친 생명력을 절대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무리하며
1989년,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에 떨어졌던 여덟 살 꼬마는 그렇게 주먹다짐과 과라니어를 거쳐 조금씩 살아남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혼란과 두려움마저 지금은 제 인생의 소중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민이나 자녀 유학을 경험하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부터 현지 환경에 완전히 던져놓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어느 정도 안전한 커뮤니티 안에서 적응을 시작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여러분의 경험과 생각도 댓글로 함께 나눠주세요. 🇵🇾✨
